백동호의 소설 실미도를 원작으로, 강우석 감독이 제작하여 2003년 12월 24일 개봉되었다. 국내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이면서도 역사에서 지워지고 숨겨진 실미도 사건을 재구성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2004년 청룡영화상 최우수작품상,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역대 한국 개봉 영화 최초로 전국 1천만 관객을 기록한 영화이기도 하다.
줄거리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부 124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앞까지 침투했다가 실패한 '1.21 사태'가 일어나자 보복을 위해 박정희 정부의 중앙정보부가 대한민국 공군 산하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구성원은 사형수, 무기수, 일반 재소자들이 포함된 사회 밑바닥 계층인데, 이들에게 작전성공 시 모든 형벌 취소 및 전과 기록 말소, 군 복무를 원하면 소위 임관 등 정부로부터 새 삶을 보장하는 조건이었다.
1968년 4월에 창설하여 '684부대'[2]라 불렸던 이 부대는 김신조 부대와 똑같이 31명으로 구성되었으나 훈련도중 사고, 탈출, 처형 등으로 7명 사망, 결국 24명이 최후까지 살아 남는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북파되어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의 목을 따오는 것'이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지옥훈련을 통해 이들은 단 3개월만에 북파 가능한 인간병기가 되었다.[3] 부대가 창설된 지 4개월만에 첫번째 실전명령이 떨어져 바닷길로 북에 침투를 시도하지만 상부의 저지로 중도무산된다. 이후 3년 4개월간 '출정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그들의 긴긴 기다림은 시작된다.
그 사이 남북한의 상황은 처음 실미도 부대를 창설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남북 화해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고 중앙정보부장이 교체되는 등 급격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구 시대의 유물'이자 '유령부대'가 되어버린 실미도 684부대. 교육대장이 '차라리 월남에라도 파병해달라. 저들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공을 세우고도 남는다.'라고 건의했지만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거부당한다.
점점 684 부대가 푸대접을 받는게 영화가 진행될수록 드러난다. 특수부대원들이 실미도에 갓 들어왔을 때 식단은 흰 쌀밥과, 삶은 통닭 한 마리씩과, 소불고기, 생선튀김, 갖가지 채소류 등이 고봉으로 듬뿍 제공되는 등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히고 풍성한 식단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고기를 자주 먹지 못했던 당대에는 꽤 화려한 식사였다.
반면 기간병들의 식단은 나물, 짠지, 보리밥, 똥국이 전부다. 그러나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된 이후부터는 대원들에게 보리밥에 똥국, 감자 쪼가리, 김치가 전부인 열악한 배식이 되었고, 그마저도 양이 현저히 줄어 상필이 찬석에게 짜증을 내며 "밥을 더 퍼달라."고 할 정도였다. 시나리오에서도 처음 10개월에 비해서 684 부대에 대한 보급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너무 차이가 난다는 박 중사의 대사가 있으며, 작중에서도 교육대장인 최재헌 준위가 "684 부대원들에 대한 대우는 재소자만도 못하다"고 공군본부 관계자에게 항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군기도 마찬가지로 중반부 작전 취소 전까지는 훈련 중에도 대단히 매섭고 전형적인 특수부대의 모습을 띄지만, 작전 취소 후 하염없이 늘어지는 출정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점점 말년병장처럼 늘어지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결국 대원 2명이 탈영을 해서 민간인 여교사를 강간하는 일탈을 하다가 포위되어 1명은 자살하고 다른 1명은 자살에 실패하여 체포되었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른 대원에게 살해당하는 일까지 터졌다.
결국 그들을 제거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진다.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실미도 특수부대원들이 정보를 입수하고 선제 공격을 가해 담당 기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전멸당한다. 이들은 단 십여분 만에 실미도를 장악한다. 극중 훈련 장면에서 이런 전투력의 차이를 계속 보여줬고 기습공격까지 했으니 개연성이 충분한 장면이다. (예를들어 훈련 초반의 구보 장면은 기간병들이 앞서 뛰어가고 특수부대원들은 기진맥진하면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중반 이후에는 아예 완전군장에 총기까지 휴대하고 뛰는 특수부대원들을 T셔츠 차림의 기간병들이 간신히 쫓아간다. 게다가 중반부 작전이 취소된 후에 사격 훈련을 하는데 권총으로 대충 쏘는데도 머리, 가슴, 거시기(...)를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탈출 과정에서도 얼추 백 미터 이상 떨어져 보이는 해안경계 초병을 구보하며 한 방에 헤드샷 날렸다. 애초부터 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투입된 이들도 공군에서 고르고 고른 특수부대 출신들임을 감안하면 더 무섭다. 또 실미도 대원들은 북으로의 침투를 대비해 자동소총인 AKMS사용법을 숙지해 두었고, 봉기시에도 그것을 사용했기에 반자동소총인 M1 카빈을 든 기간병을 쉽게 제압했다.
특수부대원들은 인천으로 상륙, 송도 외곽에서 시외버스를 탈취, 청와대로 향한다. 이 사건은 라디오에서 공비의 공격으로 보도되며 특수부대원들까지 듣게 된다.[4]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발동된 가운데 이들은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자신들을 포위한 대한민국 육군 보병, 경찰특공대 및 특전사 병력들과 교전을 벌이고[5] 일부는 사망하고 대부분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민간인들을 버스에서 내리게 한뒤, 전원 자폭이라는 최후를 선택한다.
등장인물
공군 특수부대 준위(준사관)로, 대원들을 선별하여 부대를 조직하고 훈련시킨다. 북한 지역을 20번 이상 드나든 베테랑 요원이며, 한국전쟁에서 가족이 몰살당한 과거가 있다.[7] 부대를 정리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고 조돈일 중사, 박상근 중사와 함께 어떻게 할 것인지 회의를 하기 전에 강인찬에게 일부러 물을 떠오라고 시킴으로써 엿듣게 해 간접적으로 계획을 알려주어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반란이 일어난 뒤에도 가만히 막사에 앉아 있다가, 총을 들고 찾아온 강인찬과 이야기한 후 그가 끝내 자신을 쏘지 못하고 떠나려 하자 스스로 권총 자살한다. 강인찬의 그 유명한 "비겁한 변명입니다!" 라는 대사 직후에 나온, 역시 그 유명한 "나를 쏘고 가라. 아니면 내가 널 죽일 수 밖에 없다." 라는 대사가 바로 그의 유언이다. 일본판 성우는 소프트판은 츠카야마 마사네, 테레비 아사히판은 니시다 켄.
일명 '조 중사'(별칭으로 '좆 중사'라고도 불렸다.)로 작중 등장하는 간부인적기록에서는 1936년생으로 나온다. 고향은 전라남도 완도군 출신.[8] 1956년 군에 입대한 것으로 나오며 부대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훈련과정에서 부대원과 기간병을 가릴것 없이 주먹을 굉장히 많이 휘두르는데 거의 모든 부대원들이 훈련과정에서 조 중사에게 얻어맞았을 정도였다. 게다가 강인찬이 강인찬 어머니 사진을 조근재와 한상필이랑 같이 보다가 이를 알게된 조 중사가 강인찬이 보는 앞에서 그 사진을 찢어버리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인으로 보이지만, 알고보면 누구보다 부하들을 챙겨주는 남자로 부상을 입어 퇴출시켜야 하는 박찬석을 조리병으로 부대에 남겨 주는가 하면, 부대 해체 및 부대원들의 제거 명령에 반발하고 부대원들을 살리고자 백방으로 노력한다. 훈련 기간동안 박상근 중사와는 자주 갈등을 일으켰는데,[9] 부대 해체 명령이 내려온 이후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된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부대 해체를 막아달라는 청원을 하기 위해 공군본부에 올라가 있어서 부대원들과 만나지 못했다. 열렬한 부대 해체 찬성파였던 박상근 중사가 최재헌 준위에게 출장이라는 핑계로 반대파였던 조돈일 중사를 공군본부로 쫓아내 두자고 건의한 것이다. 그리고 "씹을 것 좀 사다달라."는 조근재의 부탁에 실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10][11] 알았다고 대답하고, 이후 진짜로 부대원들이 먹을 사탕 등 군것질 거리들을 사가지고 오다가, 소식을 듣고는 대방동 포위 현장으로 달려와 지프에서 내려 버스로 뛰어갈때 사탕 봉지를 떨어뜨리는 장면에서 많은 관객이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진압군의 대대장에게 찾아가서 "쟤들 무장공비 아닙니다. 버스 안 병력, 제 부하들입니다. 제가 어떻게든 설득해올 테니까 제발 살려주십시오."라고 필사적으로 애원하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끌어내려지며 부대원들이 자폭하는 장면을 눈 앞에서 봐야 했다. 버스를 향해 달려 가지만 폭발의 열기 때문에 다가가는건 무리였고 그렇게 버스 앞에서 울먹이는 쉰 목소리로 "상필아! 인찬아! 안돼 이 새끼들아! 안돼!"라며 부대원 한명 한명의 이름을 외쳐대는 것을 마지막으로 작중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되돌아온다. 조돈일이란 이름은 가명이며 이는 생존 기간병들의 개인정보보호를 위해서라고 한다. 실제인물의 본명은 김방일 예비역 공군 준위로, 1990년까지 공군에서 복무하다 예편했고 이후 그것이 알고싶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에 출연하는 등 부대원들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운동을 벌였다. 영화 실미도의 개봉과 천만관객 달성까지 지켜보았으며 개봉 2년 후인 2005년 별세했다.[12] 일본판 성우는 소프트판은 나카무라 히데토시, 테레비 아사히판은 타니 아츠키.
사형수[13] 출신. 거칠고 험한 성격이며, 처음에 강인찬과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14] 기싸움을 하다가[15] 나중에는 어찌어찌해서 친구가 되는 인물. 마지막에 조 중사가 찢어버린 강인찬 어머니 사진 조각 모아 붙인 걸 건네준다. 설정상 강인찬보다 2살 형이다. 개그 캐릭터인 원희를 자신의 따까리로 두고 있는데, 원희가 개드립을 칠 때마다 옆에서 상필이 쥐어박는 담당일진 모습을 보여준다. 탈영과 여교사 성폭행사건 이후 원희를 때려죽인 강인찬에게 "내 따까리새끼, 내가 죽였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 애증의 존재였던 듯 하다. 나중에 반란 사건이 터졌을 때 부대원들이 조교들을 모두 쏴 죽이고 박상근 중사가 절벽에 몰린 상황에서 서로 살 길을 찾아보지 왜 그랬느냐는 인찬의 질문에 "너희 같이 이름도 없는 새끼들"이라고 대답해버린[16] 박 중사를 쏘아 죽인 뒤 "내가 왜 이름이 없어. 나 한상필이야 한상필이라고 씨발새끼들아!!!!!"라고 절규하면서 허공에 대고 총을 갈겨대는 것이 명장면. 일본판 성우는 소프트판은 야마지 카즈히로, 테레비 아사히판은 세키 타카아키.
1조 부대원. 개그 캐릭터. 싸움 실력도 뛰어나지 못한 주제에 자기보다 싸움 실력이 훨씬 뛰어난 한상필에게 매번 대드는, 그야말로 당랑거철의 대명사. 강인찬과 한상필이 격투기 싸움을 할 때 조언한다고 "숙여! 숙여 이 새꺄!"라고 말했다가 상필이 시킨대로 하다가 되려 인찬에게 더 얻어맞게 되고 패배하게 되자 완전군장 산악구보 시간 내내 원희를 마구 갈구고 때린다. 특히 북한측 고문에 대비한다며 실시된 인두로 몸 지지기 훈련 중의 모습이 압권인데, 아직 인두가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상상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서 조교가 멍하니 바라보게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흑백 전쟁 영화 상영시간에 고자 드립과 섹드립[17]을 하며 안절부절하다가 썰물이 빠지는 시간을 이용해 화장실을 핑계로 평소 붙어다니던 대원 1명과 함께 섬을 탈주, 옆동네 무의도에 있는 학교에 들어가 보건교사를 윤간하다가[18] 결국 발각된다. 부대원들이 학교를 포위하자 함께 간 대원과 같이 죽기로 하고 원희가 먼저 공범을 찌른다. 2년간 살인 기계로 길러졌으니 단칼에 사람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공범이 죽고 원희도 자살하려 하나, 그 때 인찬을 포함한 각조 조장들이 들이닥쳐 자살을 막는다. 결국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연대책임을 물어 전 부대원이 각목 구타(...)를 당하는 장면을 기둥에 팔다리가 묶인 채 두 눈으로 지켜보게 되는데,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나중에는 폭주, 난 그래도 했다. 니들은 아직도 못 해봤지?라는 식으로 어그로를 끌고 적기가를 부르다가[19] 인찬의 각목 일격에 맞아 죽는다.[20] 일본판 성우는 소프트판, 테레비 아사히판 둘 다 타카기 와타루.
1조 부대원 역할. 구름다리를 건너는 훈련 도중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치면서 퇴출될 뻔 하지만, 잡일이라도 도맡아서 할 테니 남게 해 달라고 애원했고,[21] 조근재 역시 "조 중사님, 만약 찬석이가 모든 잡일들을 다 맡아서 하게 된다면, 나머지 부대원들은 훈련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능률도 더 오르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로 찬석의 편을 들어주면서 결국 조리병으로 남게 된다. 동생들을 혼자서 밥 먹여 키웠기에 요리 실력 하나는 끝내준다고 한다. 이 외에도 뱀술 만들기 능력자이기도 하다. 반란 중 화장실에서 자신을 담당했던 기간병을 쏘는 척하면서 죽이지 않고 살려줬다.[22] 부상당한 몸으로 죽지도 않고 버스 탈취 시점까지 동행하지만 버스 안에서는 가장 먼저 죽는 인물. 일본판 성우는 소프트판, 테레비 아사히판 둘 다 후지와라 케이지.
극중의 대사로 미뤄보아 조직폭력배의 보스 내지는 중간보스였던 것으로 보인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사투리(동남방언)를 사용한다.[23] 다른 부대원들보다 나이가 많고[24] 큰형님과 같은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대인배이다.[25] 무술 실력도 상당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인찬과 상필의 싸움을 말리고자 자신이 직접 칼을 내무반 바닥에 내던지면서 나섰고[26] 이에 반발하는 상필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한방에 넉다운[27] 시켰다. 자신을 담당하고 있는 21세의 어린 기간병과 각별한 우정을 쌓았는데,[28] 반란 중 어쩔 수 없이 그를 쏜 후에는 죽어가는 그를 끌어안고 오열하다가 박상근 중사의 총에 뒤를 맞고 사망한다. 조장 중 유일하게 부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죽은 인물이다. 일본판 성우는 소프트판은 츠지 신파치, 테레비 아사히판은 이와사키 히로시.
작중에서는 1938년생으로 나오며 고향은 경상북도 달성군 출신. 조 중사와 입대일과 계급은 같지만 설정상 나이는 2살 아래다. 기독교인이며[31] 유부남으로 한 달 후면 태어나는 아기가 있다. 조 중사와는 대조적인 성격의 교관으로, 욕설이나 손찌검을 하는 장면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대원들을 유화적으로 대했으며 구름다리 훈련 도중 부대원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항상 혹독하기만 한 조 중사와는 갈등의 골이 깊어진다. 하지만 실미도 부대원을 정리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자 박 중사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그에 따라 부대원들을 죽이려다가 분노한 부대원들에게 포위되고, 이들과 말싸움을 벌이던 중 "너희 여기 들어온 직후 정부에서 너희들 주민등록을 말소했다. 너희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여기서 유령이 되었다는 거야. 너희같이 이름도 없는 새끼들이랑 우리랑 뭐가 똑같아?"라고 어그로를 끄는 바람에 총격을 받고 벌집이 되어 사망한다.[32][33] 그간 부대원들에게 그렇게 잘 해주던 사람이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없이 돌변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 내지 위화감을 느꼈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실 미혼인 조 중사에 비해 처자식을 둔 젊은이인 박 중사 입장에서 위험을 감수해가며 부대원들을 보호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남은 기간동안 어떻게든 부대원들을 살려보려고 노력한 조 중사에 비하면 박 중사는 다소 비겁하고 냉정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박 중사는 초반부부터 중반부까지는 부대원들을 진정으로 위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아마도 개개인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말살하는 답답한 부대 안 환경에서 처음의 다정다감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사람도 점점 흑화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부대원 말살 지시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중사님답지 않다고 한 기간병들을 후려패며 그 유명한 대사인 "나다운 게 뭔데!"를 하기도 한다. 일본판 성우는 소프트판은 사쿠야 슌스케, 테레비 아사히판은 미야우치 아츠시.
3조 부대원 역할. 처음에 배를 탔을 때 모 군인에게 담배 한 갑 있으면 좀 달라고 하고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담배 한 보루로 갚겠다는 말을 하지만 계속 씹히자(...) 결국 화를 내면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게 된다. 입소 당시 '언제는 안전장치 달고 사시미 뜨러 다녔냐?'라는 대사로 미루어보아 조폭 혹은 칼잡이 출신인 듯. 일본판 성우는 소프트판은 이토 켄타로, 테레비 아사히판은 단 토모유키.
3조 부대원 역할. 처음에 배를 탔을 때 모 군인에게 담배 한 갑 있으면 좀 달라고 하고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담배 한 보루로 갚겠다는 말을 하지만 계속 씹히자(...) 결국 화를 내면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게 된다. 입소 당시 '언제는 안전장치 달고 사시미 뜨러 다녔냐?'라는 대사로 미루어보아 조폭 혹은 칼잡이 출신인 듯. 일본판 성우는 소프트판은 이토 켄타로, 테레비 아사히판은 단 토모유키.
고증
영화는 실미도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되었고, 실제 사건과는 대략적인 전개는 비슷하지만 각색이 심하게 되어있어서 세부적인 면은 실제 사실과는 많이 어긋나기 때문에 이 점을 유의해서 봐야한다.
비록 영화 트레일러에 '실제 실미도 684부대 사건과는 무관합니다.'라고 대놓고 적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적어도 사건이 지나치게 바뀌고 원작 소설판의 내용들 마저 왜곡 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거의없다는 천만 관객 영화 부관참시 프로젝트에서 "실미도 사태가 비극적이라는 것을 알리는 척 하면서 사건들을 왜곡 시켜서라도 관객들을 억지로 울리며 감성팔이 하는 영화."라고 깠다. 특히 영화 감독이 강우석이라는 사실은.....
부대원들의 출신 성분
'범죄자'나 '밑바닥 인생'을[36] 주로 포섭한 것으로 나오지만 이런 식의 '범죄자들로 이루어진 부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극적인 효과를 위한 영화적 장치일 뿐이다. 실제 북파공작원으로 모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시골의 순박한 청년들도 있었고[37], 운동선수나 서커스단 단원, 운전기사 등의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원도 있었다고 한다. 적지에 침투한 후 일어날 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실제 부대원들이 버스를 탈취해 서울을 향해 가던 중 버스기사가 도망치자 버스운전 경험이 있던 부대원이 대신 운전하였던 것으로 미루어봐도 임기응변을 위해 여러 방면의 이력이 있는 인원을 소집한 것은 설득력이 있다. 이 때문에 부대원을 범죄자 출신으로 묘사하였다고 해서 유족들의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38][39] 물론 진짜 전과자 출신도 존재하긴 했다. 다만 영화에 나온 것처럼 살인 등의 중죄인이나 건달이 아니라, 임기응변에 능하고 손재주가 좋은 소매치기 등이 선호되었다고.
다만 영화상의 부대와 비슷한 성격의 부대가 실제로 존재하긴 했다. 1.21사태 이후 창설된 보복부대(공군 산하 실미도 부대, 해군 산하 장봉도 부대, 육군 산하 선갑도 부대) 중에서 육군 선갑도 부대는 실제로 안양교도소에서 착출된 인원으로 부대원들을 구성했다. 물론 김일성 사살 계획이 유야무야되었다고 이들이 살해당하는 일은 없었고, 해체 이후 부대원들은 다시 교도소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졸지에 생겨버린 '대한민국 공군이 형벌부대 운영한다'란 착각은 지워지기 힘들어졌다.
부대원 선별
영화에서는 교육대장(안성기)이 직접 교도소를 찾아다니며 대원들을 스카웃하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실제로는 중앙정보부(혹은 공군측)의 모병관이 신체능력이 우수한 자원을 물색하여 입대를 설득, 유도했다.
입대 사유
영화에서는 재소자나 사형수를 주로 소집하였기 때문에 사면(赦免)을 목적으로 입대한 것으로 묘사하지만, 실제 부대원들은 재소자가 아니었으므로 입대사유 또한 다르다. 장교후보생에 준하는 대우와 작전 성공시 상당한 보수, 장교로 임관 기회 부여, 남자로써의 공명심(功名心) 등을 이유로 입대한 것으로 밝혀졌다.
교육대장 외 2명의 중사 교관
교관은 공군 자체의 특수전 이수자로 미국령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에서 특수정보수집 및 정글전 훈련까지 이수한 정보 특기자들이었다. 실제 계급은 부사관이었지만 실미도에 부임할 때는 공군 소위계급으로 임관 하였으며 작전이 성공할 경우 정식 임관할 예정이었다.
사용 장비
영화에서는 AK-47 소총 등을 사용한 것으로 묘사되지만,[40] M1 카빈, M3 기관단총, PPS-43 기관단총 등을 사용하였으며 1일 500발의 실탄 사격을 하였다. 후에 뉴스에서 실미도 영화에서 사용된 AK47은 소품이 아닌 진짜 총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훈련 도중 인원 손실
영화에서는 구름다리 훈련 도중 1명이 사망, 그리고 1명이 부상당하여 급양병으로 보직 변경하는 걸로 나오지만, 실제 구름다리 훈련 중 사고를 당한 2명은 모두 부상만 당했으며, 작업병 등으로 부대에 남았다. 수영훈련 중 1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 유일한 훈련 중 사망자이다.[41]
즉결처형자의 수
영화와 비슷한 방식의 즉결처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만 인원 수와 처형 내용 등은 차이가 있다. 생존자의 증언으로는 익사 1명, 즉결처형 6명으로 알려저 있으나, 국방부 공식 문서에는 익사 2명, 도주 중 체포돼 즉결처분 2명, 자살 3명이라고 기록돼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출동
영화에서는 (사망, 부상당한 인원을 제외한)부대원 전체가 배를 타고 침투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작전[42] 중지 명령을 하달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부대원 중 최정예 9명을 선발하여 비행정을 이용해 침투할 계획이었고 작전 중지 명령이 내려진 건 출발 직전이었다.
작전 취소 이유
영화에서는 7.4 남북 공동 성명과 중앙정보부장의 교체 등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언급하지만, 미국의 인가 없는 작전 실행에 대한 염려 때문이라는 음모론도 있다.[43]
교관과의 관계
영화상에는 2명의 교관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오지만, 실제로는 자원해서 남기로 한 김방일 소대장 외에 특수전 교육을 받은 교관은 모두 전출되고 부대 성격과 무관한 일반 하사관들이 부임하였다. 즉, 영화상의 교관과 부대원간의 관계는 모두 영화적 상상에 의한 허구이다.
조 중사의 육지 방문
영화에서는 부대 해체를 중지해달라는 청원을 이유[44]로 공군본부에 출장을 간 걸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 조 중사의 모델이 된 김방일 소대장은 인천으로 부상당한 어민의 문병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약혼자의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하루 늦게 복귀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김방일 소대장이 뭍에 나가있는 날을 골라서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김방일 소대장이 부대원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고 존경받았었음을 보여준다.
부대장의 사망 경위
영화에서는 교육대장(안성기)이 권총 자살하는 것으로 묘사되나, 실제로는 자고 있던 부대장을 당번병이 망치로 때려 살해했다. 이 부분이 문제가 되어 실제 교육대장의 유족이 영화사를 고소하기도 했다.
버스 탈취 후 행적
영화에서는 버스 탈취 후 바리케이드를 세운 진압군과 한차례 교전 후 서울로 향하지만 당시 실제 684부대원이 탈취한 버스에 타고 있었던 고 우문국 화백의 증언(기사)에 따르면 버스 탈취 후 석바위에서 버스가 펑크나자 뒤에 오는 다른 버스를 탈취하여 탑승하였으며, 탑승하자마자 진압군이 사격을 가했다고 한다. 이후 차내에서도 어디로 향할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또한, 영화에서는 버스에 타고 있던 민간인들을 내보내고 자폭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다 같이 자폭했다. 때문에 출근하던 시민들이 하루아침에 저세상으로 동행하고 말았다. 실미도 개봉 얼마 후 월간 조선에 나왔던 기획기사에 따르면, 자폭보다는 사고사에 가까운 방식이었다고 한다. 수류탄을 갖고 놀던 부대원이 실수로 바닥에 핀 뽑은 수류탄을 떨어뜨렸다. 이 수류탄은 바닥에서 15' 각도로 파편을 뿌리는 세열 수류탄이었기에 바닥에 바짝 엎드려 있던 민간인들은 피해를 적게 입었으나, 앉아있었던 부대원들 대부분은 큰 부상을 입어서 상황이 자연스레 끝났다고 한다. 영화와 달리 당시 탈취한 버스를 운전하던 버스 기사도 생존했으며, 훗날 증언으로는 군경의 눈에 띄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길을 경인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따라 가고[45] 자잘한 법규위반을 하는 등 경찰의 시선을 끌고자 노력했지만 인천을 벗어나 서울로 올라가는 동안 검문은 커녕 군경과 조우도 못했다고 한다.
버스 자폭 이후의 부대원 근황
영화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지만[46], 실제로는 6명이 살아있었다. 6명 모두 중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그 중 상태가 심각했던 2명은 후송 도중 사망했고 최종적으로 4명이 살아남았고, 그 4명도 결국 군사재판에서 1, 2심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타깝게도 시신마저 불법 암매장으로 처리되어, 현재까지도 그들이 어디 묻혔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부대원 2명 탈출 후 강간
실제 사건 당시 탈출한 인원은 생존자 증언으로는 3명, 국방부 공식 문건에는 4명이었다. 실제 피해자는 보건 교사가 아니라 마을 처녀 2명이었다. 2명은 각각 당시 20세, 17세의 자매였으며 지금은 가정을 꾸리고 정상적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영화에선 안 나오나, 이 사건 이후 부대원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기밀 엄수 지시를 내린 뒤 육지 집창촌에 순번제로 보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대원 몇몇이 자신을 상대한 창녀에게 쪽지를 건네거나 몸에 글자를 쓰는 식으로 가족 등에게 자신들의 상황을 전하려 했으나, 대원들이 나간 뒤 공군 헌병들이 들어와 이것들을 전부 압수하고 지워버렸다.
부대 상징물의 위치
인골(人骨)로 장식한 '우리의 신조'는 영화에서는 교육대장(안성기)의 사무실 벽에 있지만 실제로는 체력단련장 옆에 있었다. 유골은 담력훈련 및 성병 치료용 민간요법(...)을 위해 인천의 중국인 무덤[47]을 파헤쳐 확보한 것이며, 나머지 유골은 갈아서 민간요법으로 나눠먹었다고.
평가
한국 최초의 천만 관객 영화이자 실미도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라는 사실을 볼 만 하지만, 지나치게 사건을 각색하고 신파적인 장면들을 넣었다는 점은 비판받고 있다.
"실미도 같은 엄청난 소재를 가져다가 겨우 눈물을 짜내는 신파극을 만든 다는 것은 옥돔이나 참돔을 겨우 힘들게 잡아줬더니만 겨우 라면에 넣고 끓여 먹는 경우입니다."
거의없다 영화 걸(乞)작선
그외
허준호는 영화 실미도에 2번이나 캐스팅 되었다. 2000년 김호선 감독이 제작한다고 했을 때 출연 제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역할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부대원이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명령대로 따른 교관들을 대변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조 중사 역을 선택했다고 한다.
영화 내용이 주로 북파부대원들의 훈련내용인 만큼 체력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었는데, 출연자 모두 많은 운동으로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한다. 특히, 출연자들중 가장 고령인 안성기는 영화 출연제의를 받을 때부터[48] 꾸준히 운동을 했는데 이미 그는 이전부터 근육질을 꾸준히 유지했었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영화 제작발표회 당시 영화 성공기원 고사를 겸해 실미도 부대원 추모제를 지내기도 했다. 영화 완성된 후에도 영화 완성을 기념해 실미도를 찾아 위령제를 지냈다. 이때는 바람이 너무 강해 배가 섬에 들어갈 수 없어 섬이 보이는 곳에서 지냈다고.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실미도 부대' 세트장은 제작비 10억 원을 들여 완공했다. 섬에서 섬에 위치한 산으로 촬영장비를 옮기는데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CH-47 헬리콥터를 이용하였다고 하는데 사실은 삼성항공에서 구입하여 운용중이었던 Mi-26이었다.이건 실미도 DVD의 스페셜 에디션 DVD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링크. 애당초 CH-47이 세계최대의 헬기일 리가 없다. 물론 영화 관련 언론에서는 전부 시누크라고 베껴 표기하였다.
촬영이 완료되자 무허가 건물임을 이유로 관광지 가능성을 무시하고 모두 철거해버렸다. 만약 무인도라는 이유로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었다면 지금쯤 엄청난 관광명소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한국 영화 최초로 천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관광객이 몰려왔으나 세트장이 죄다 철거되어 뭐 볼 게 있어야지... 지금은 촬영장이었음을 알리는 안내판만 남아 있다. 이 일로 인해 인천 지역 관광수입 증대에 타격을 주었다는 이유로 인천시 중구 부구청장이 직위해제되기도 하였다.
버스 탈취 장면에 사용된 버스는 영화 스피드에 사용된 것과 같은 계열인 1966 GM TDH 5303 모델을 기반으로 각각 2억 원을 들여서 2대를 특수제작하였다. 또, 버스운전사 역 연기자는 영화의 무술감독이었다.
주연과 조연이 모두 남자라서 여자의 비중은 사실상 없다.[50] 그나마 비중이 있는 배역으로 강인찬의 어머니와 강간당한 국민학교 여교사가 등장하지만 둘 다 대사는 없다. 그런데 버스 안 인질 중 어머니 역 연기자가 여자 배역 중에서는 유일하게 대사가 있다.[51] 극장에서 부모님과 같이 보거나, 2005년 설특집 MBC 방영분을 부모 혹은 친척이 모여서 봤던 사람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고 한다.
박 중사의 갑작스런 인간성 변화는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 다만, 감독 스스로도 이것을 관객이 이해해줄지 의문이었는데 감독의 딸이 인상 깊게 보았다고 평하자 그대로 간 것이라고 한다. 또 박 중사가 최초로 폭력을 쓰는 장면에서 폭행당하는 조교 역할은 실제 박 중사(이정헌)의 대학 후배였다고 한다.
교육대장(안성기)의 시계가 시대배경과 다르게 루미녹스라 옥에 티.
7개월간 강원도 - 부산 - 인천 - 실미도 - 제주도 - 부안군 - 파주를 오가며 장거리 로케이션을 감행해야 했다. 또한, 수중침투 장면은 지중해 몰타 MFS 스튜디오, 겨울 훈련 장면은 뉴질랜드에서 촬영했는데, 각각 경비가 7억 원, 5억 원이 소요되었다
위의 장면을 찍을 때 스텝들이 가짜 폭탄이라 전혀 뜨겁지 않을 거라고 배우들을 안심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현시창 배우들은 전원 상의탈의 상태였기에 폭탄이 터지자마자 앗 뜨거!를 외치며 달려나갔으며(...), 눈밭에 구르는 장면도 사실 없었는데 등을 식히려고 다들 굴렀다고(...) 그리고 그 결과 다들 등짝이 까져서 피를 봤다고 한다. 뉴질랜드의 저 눈밭은 갓 쌓인 부드러운 눈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여서 얼고 서릿발이 날카롭게 진 눈이었기 때문. 여러모로 배우들의 고생이 상당한 영화였다.
명대사로는 "날 쏘고 가라."[53]와 "비겁한 변명입니다!"[54]가 있다. 마이너 하지만 내가 왜 이름이 없어?! 나 한상필이야~!!도 꽤 유명하다.[55] 촬영 전에는 부대원들의 대사를 북한 사투리(서북 방언)로 하려고 했지만 취소되었다.
역대 한국 개봉영화 최초로 전국 1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다. 최종 관객 집계는 전국 1108만 관객으로 2019년 기준 역대 흥행 21위이자 한국 영화론 18위이다.[56] 또한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전국에 실미도 바람이 불어 실제 실미도 사건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영화 관람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중년 남성들을 극장으로 향하게 만들어 화제가 됐다. 2004년 1월 문화일보 기사.
당시 극장에서는 40~50대 중년 남성 관객들이 숨 죽인 채 몰래 폭풍 눈물을 흘리는 진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맞춤법 틀렸다. 게다가 배우 이름도 틀렸네.
영화 촬영에 사용된 소품용 총기가 밀반입된 실제 총기로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품용 총기는 공포탄만 발사되고 실탄은 발사할 수 없도록 총구에 초크라는 부품을 영구적으로 고정해서 총구를 좁혀야 하는데, 해당 총기들은 초크가 빠질 수 있는 상태여서 관련 법에 걸린 것. #
조용필이 부른 테마곡인 '태양의 눈'도 좋은 노래다.[57] 다만 가수가 무려 조용필인지라 실미도라는 사건에 맞게 매우 장중하면서도 빠와가 넘치는 노래인지라 고음부가 꽤 많다. 이 때문에 해당분야에서 전설로 평가되는 중학교 동창들이 한 영화에 관계되는 희소성이 생겼다. 영화의 등장인물인 안성기와 조용필이 중학교 동창이기 때문이다.
북한 군가인 적기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북한 군가라지만 1880년대에 영국 노동가요에서 출발, 1920년대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거쳐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퍼진 꽤나 유서깊은 노래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남한 운동권 학생들에게서도 제법 불려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당시 가사는 북한 군가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58]
MBC에서 방영했을 때에는 적기가를 무음처리하여 방영했다. 실제로 북파되면 북한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북한군의 군가를 배웠다. 또한 제식훈련도 국군식과 북한식 2가지를 함께 배웠다. 이 장면이 문제가 되어 부대원들이 공산주의를 찬양하는것으로 묘사했다고 하여 유가족에게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OST 중 작곡가 이지수가 만든 1968년 1월 21일이 한스 짐머가 작곡한 영화 The Rock의 OST 중 하나인 The Chase란 곡의 일부분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60] 다만 영화 OST, 특히 BGM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냥 묻혔다(...)
2014년 화력시범 행사에서 20사단 이 영화의 OST를 쓰고 행사를 했다(....) 이 684부대라는 곡은 지금도 국방부 홍보 영상이나 예능 방송 등에 종종 쓰이곤 한다.
아무래도 이 영화가 다루는 사건이 상당히 민감해서인지, 법적분쟁이 많이 일어났다. 대법원 판결1,고등법원 판결,다른 문제로 판결
일본에서는 1년 뒤인 2004년 6월 5일에 개봉했으며, 일본판 타이틀은 SILMIDO 실미도(SILMIDO シルミド).
2017년 8월 24일, 실미도 부대원들의 합동 영안식을 하였다. 실미도 부대원들 20여명의 유해와 유해를 찾지 못한 4명 중 2명의 위패가 봉안소에 안치되었다.
11년 후 개봉한 영화 나의 독재자와 비교되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 전혀 다른 시각으로 남북관계를 바라본 영화[61]라고 볼 수 있다. 김일성 모가지를 따는데 실패한 북파공작원은 스스로 김일성이 되었다. 설경구는 두 영화에서 모두 국가로부터 버려진다. 안습
지금도 가끔 영화채널에서 방영되고 있으며 씨X같은 심한 수준의 쌍욕에는 무음처리가 이루어 졌으며[62] 잔혹한 총상에도 모자이크 편집이 이루어졌다.
Why? 갯벌 편에서 카메오로 등장한다. 실미도를 주제로 한 영화도 있었는데, 너희 그거 봤니? 그 영화는 초등학생 관람불가였다고!